90년대 초반 조금이라도 싹을 틔운 듯한 얼터너티브 록 밴드에게 기회는 열려 있었다. 메이저 레이블 애틀랜틱 레코드사와 계약한 스톤 템플 파이리츠는 프로듀서 브렌던 오브라이언과 손잡고 데뷔 앨범 녹음에 들어갔다. 작곡은 대부분 로버트 딜레오와 딘 딜레오 형제가 맡았고, 가사는 스콧 웨일랜드의 몫이었다. 1992년 9월 발매한 1집 Core는 그래서인지 밴드의 아류라는 혹평을 받았다. 펄 잼(Pearl Jam)의 에디 베더를 닮은 중저음의 바리톤 스콧 웨일랜드는 일그러진 얼굴과 목소리를 들이대며 젊은이들의 분노와 울분을 토해냈다. 언론에서 뭔가 욕설을 하던 팬들은 새로 등장한 밴드의 사운드에 매료됐다. Mtv를 적극 공략한 첫 싱글 Sex Type Thing 뮤직비디오가 1993년 1월 공개되면서 음반 판매량은 골드(50만장), 플래티넘(100만장)을 넘어 무시할 수 없는 신인 밴드의 등장을 알렸다. 코어는 이후 플러시, 크렙, 위키드 가든 같은 히트곡을 쏟아내며 지금까지 800만 장이 팔렸고 90년대 록 음악을 다룰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STP가 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의 가짜라는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펄 잼은 70년대 미국 록 밴드의 깊은 구성과 오래가는 기타 솔로를 이어받은 미국식 록을 구사했고 앨리스 인 체인스는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의 직계 후손처럼 몹시 염세적인 메시지와 무겁게 떨어지는 기타 리프를 앞세운 헤비메탈 밴드였다. STP는 딜레오 형제가 만들어내는 멜로딕한 파워코드를 앞세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기타 사운드의 중심 록을 들려준 밴드였다. 딘 딜레오는 장황하게 기타 솔로를 연주하는 대신 파워코드를 그대로 가져가는 방식으로 곡을 만들었다. 1집 최고 히트곡이면서 90년대 10대들에게 바나나 펄 잼 노래에 버금가는 송가로 남았던 플러시는 별다른 기교나 복잡함 없이 신중한 기타 코드 진행과 스콧의 외침만으로 당대 젊은이들에게 얼마든지 호소력 있게 다가갈 수 있음을 증명했다. 90년대 초반 조금이라도 싹을 틔운 듯한 얼터너티브 록 밴드에게 기회는 열려 있었다. 메이저 레이블 애틀랜틱 레코드사와 계약한 스톤 템플 파이리츠는 프로듀서 브렌던 오브라이언과 손잡고 데뷔 앨범 녹음에 들어갔다. 작곡은 대부분 로버트 딜레오와 딘 딜레오 형제가 맡았고, 가사는 스콧 웨일랜드의 몫이었다. 1992년 9월 발매한 1집 Core는 그래서인지 밴드의 아류라는 혹평을 받았다. 펄 잼(Pearl Jam)의 에디 베더를 닮은 중저음의 바리톤 스콧 웨일랜드는 일그러진 얼굴과 목소리를 들이대며 젊은이들의 분노와 울분을 토해냈다. 언론에서 뭔가 욕설을 하던 팬들은 새로 등장한 밴드의 사운드에 매료됐다. Mtv를 적극 공략한 첫 싱글 Sex Type Thing 뮤직비디오가 1993년 1월 공개되면서 음반 판매량은 골드(50만장), 플래티넘(100만장)을 넘어 무시할 수 없는 신인 밴드의 등장을 알렸다. 코어는 이후 플러시, 크렙, 위키드 가든 같은 히트곡을 쏟아내며 지금까지 800만 장이 팔렸고 90년대 록 음악을 다룰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STP가 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의 가짜라는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펄 잼은 70년대 미국 록 밴드의 깊은 구성과 오래가는 기타 솔로를 이어받은 미국식 록을 구사했고 앨리스 인 체인스는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의 직계 후손처럼 몹시 염세적인 메시지와 무겁게 떨어지는 기타 리프를 앞세운 헤비메탈 밴드였다. STP는 딜레오 형제가 만들어내는 멜로딕한 파워코드를 앞세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기타 사운드의 중심 록을 들려준 밴드였다. 딘 딜레오는 장황하게 기타 솔로를 연주하는 대신 파워코드를 그대로 가져가는 방식으로 곡을 만들었다. 1집 최고 히트곡이면서 90년대 10대들에게 바나나 펄 잼 노래에 버금가는 송가로 남았던 플러시는 별다른 기교나 복잡함 없이 신중한 기타 코드 진행과 스콧의 외침만으로 당대 젊은이들에게 얼마든지 호소력 있게 다가갈 수 있음을 증명했다.
1993년 Mtv 언플러그드 공연 1993년 Mtv 언플러그드 공연
1993년 5월 2번째 싱글로 발표된 Plush는 Mtv의 뮤직 비디오, 라디오 방송을 가득 메우고 얼터너티브 록의 전성기를 앞섰다.Plush는 1994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베스트 하드락 퍼포먼스”을 수상하고 Mtv뮤직 어워드에서 “베스트 새 아티스트”를 얻어 STP는 시애틀 록 밴드에 맞먹는 거대 신예가 됐다.데뷔 앨범치고는 너무나 잘 만든 것 아니냐고 생각할수록 완벽에 가까운 “Core”는 Plush에 버금가는 화력 코드 곡 Wicked Garden와 라디오 헤드의 동명 히트 곡과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어쿠스틱 발라드 Creep, 마이크의 대신에 확성기에 대고 부르는 스콧·우에이랑도의 버릇(?)이 받는 정신 없이 몰아치는 Crackerman, 8분을 넘는 대곡이면서 무료감 없는 Where the River Goes까지.”Core”은 90년대 얼터너티브·록 명반을 들 때 반드시 Best 5에 들어가야 한다.
STP를 지지하는 팬들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바람에 샌디에이고 신인 밴드는 쿠키커터(cookie cutter) 밴드라는 평론가들의 만장일치 혹평 등을 무시하고 다음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비운의 사고로 사망한 배우 브랜든 리(Brandon Lee)의 유작 ‘The Crow’ 사운드트랙에서 먼저 선보인 빅 엠티는 허망한 가사와 스콧의 목소리, 블루스에 가까운 곡 구성이 어우러져 2집에 대한 기대치를 높였다. 1994년 6월 발매된 2집 ‘Purple’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로 데뷔해 3주간 정상에 올랐다. 기타 노이즈로 가득한 그런지 록의 정수를 들려주는 바솔라인,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에서 무려 15주 연속 1위 기록을 세웠고, 플러시를 잇는 밴드의 대히트곡으로 떠오른 인터스테이트 러브송이 연달아 히트하며 1집에 버금가는 대성공을 거뒀다. 얼터너티브 절정기인 1994년을 화려하게 장식한 ‘Purple’은 직선적으로 닥공하는 1집과 비교해 컨트리&블루스, 어쿠스틱, 사이키델릭까지 영역을 넓혀 STP는 가짜나 쿠키커터가 아닌 오리지널 밴드임을 증명했다. STP를 지지하는 팬들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바람에 샌디에이고 신인 밴드는 쿠키커터(cookie cutter) 밴드라는 평론가들의 만장일치 혹평 등을 무시하고 다음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비운의 사고로 사망한 배우 브랜든 리(Brandon Lee)의 유작 ‘The Crow’ 사운드트랙에서 먼저 선보인 빅 엠티는 허망한 가사와 스콧의 목소리, 블루스에 가까운 곡 구성이 어우러져 2집에 대한 기대치를 높였다. 1994년 6월 발매된 2집 ‘Purple’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로 데뷔해 3주간 정상에 올랐다. 기타 노이즈로 가득한 그런지 록의 정수를 들려주는 바솔라인,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에서 무려 15주 연속 1위 기록을 세웠고, 플러시를 잇는 밴드의 대히트곡으로 떠오른 인터스테이트 러브송이 연달아 히트하며 1집에 버금가는 대성공을 거뒀다. 얼터너티브 절정기인 1994년을 화려하게 장식한 ‘Purple’은 직선적으로 닥공하는 1집과 비교해 컨트리&블루스, 어쿠스틱, 사이키델릭까지 영역을 넓혀 STP는 가짜나 쿠키커터가 아닌 오리지널 밴드임을 증명했다.
스콧의 공백기에 남은 멤버들은 프로젝트 그룹 토크쇼(Talk Show)를 결성해 1997년부터 98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스콧도 1998년 솔로 앨범 12 Bar Blues를 발표했다. 1998년 말부터 STP에서 모인 4명은 다음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1집 시절로 돌아가 더 크고 강한 사운드로 돌아온 4집 No.4는 얼터너티브 메탈이라는 평가를 받은 첫 싱글 Down으로 3집의 멜랑콜리한 사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이번에도 웨일랜드의 고질적인 마약 문제가 밴드의 발목을 잡았다. 앨범이 나오기 직전 다시 체포된 스콧은 이번에는 1년간 감옥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런 프로모션이나 인터뷰 없이 뮤직비디오는 연결 영상으로 만들어야 하며 투어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던져진 ‘No.4’는 100만장이 넘는 성적을 기록하며 90년대 STP 활동의 종말을 알렸다. 건강한 모습으로 컴백한 스콧이 틴에이지 스타 사라 미셸 개런티와 함께 찍은 뮤직비디오가 폭발적인 인기를 기록한 쏘 걸 히트로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스톤 템플 파일럿츠라는 이름은 90년대라는 시간에 박제될 운명이었다. 스콧의 공백기에 남은 멤버들은 프로젝트 그룹 토크쇼(Talk Show)를 결성해 1997년부터 98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스콧도 1998년 솔로 앨범 12 Bar Blues를 발표했다. 1998년 말부터 STP에서 모인 4명은 다음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1집 시절로 돌아가 더 크고 강한 사운드로 돌아온 4집 No.4는 얼터너티브 메탈이라는 평가를 받은 첫 싱글 Down으로 3집의 멜랑콜리한 사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이번에도 웨일랜드의 고질적인 마약 문제가 밴드의 발목을 잡았다. 앨범이 나오기 직전 다시 체포된 스콧은 이번에는 1년간 감옥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런 프로모션이나 인터뷰 없이 뮤직비디오는 연결 영상으로 만들어야 하며 투어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던져진 ‘No.4’는 100만장이 넘는 성적을 기록하며 90년대 STP 활동의 종말을 알렸다. 건강한 모습으로 컴백한 스콧이 틴에이지 스타 사라 미셸 개런티와 함께 찍은 뮤직비디오가 폭발적인 인기를 기록한 쏘 걸 히트로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스톤 템플 파일럿츠라는 이름은 90년대라는 시간에 박제될 운명이었다.